[제민포럼] 젠더전쟁 (2019.12.29)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다. 식당 통로에서 우연히 마주쳐 지나가는 여성의 엉덩이를 1.3초만에 움켜쥐는 강제추행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유죄를 확정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다양한 미투를 통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젠더 이슈의 연장선에서 크게 타오르고 있다.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젠더 문제가 당분간 우리사회의 주요 의제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기성세대, 그중에서도 특히 남성들은 젠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가 넘쳐나는데 굳이 남녀의 갈등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이슈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러 무감각한 사람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그리 만만치는 않다. 양 진영의 대립은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고 있어 실로 전쟁을 방불케 한다.  특히 2~30대 남성은 전쟁의 최전선에 서기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역차별을 겪어왔으며, 여성들의 억압은 옛날 얘기인 만큼 더이상 자신들이 희생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억울함을 주장하는 것은 메아리 없는 외침과 같다. 이 문제가 단지 개인의 억울함이나 특정 세대와 계층의 차별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젠더 문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관계가 있다. 지금 이러한 논란은 전에 없던 갈등이며, 우리 사회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쉬운 예로 많은 조직은 여전히 남성 중심 문화를 지키고 있다. 남성 중심이란 남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남성이 의사결정하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승진에 대한 권한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다. 물론 조직 문화가 많이 변하고 있다. 직종에 따라 여성이 이미 주도권을 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섬세한 차별과 억압적 시선이 곳곳에 녹아있다. 여자 아이는 착하고 조신해야 함을 끊임없이 듣고 자라는 반면 남자들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그저 편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거나 백팩을 뒤에 메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무감각하기만 하다.

 

개별적으로 역차별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남자들이 서있는 토양은 이미 다져진 토대 위에서 느끼는 불편함, 혹은 기득권자들이 가진 권리를 침해 당하면서 느끼는 분노에 가깝다. 무감각해도 되는 기득권의 입장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시각이 있다. 스쳐지나가는 말 한마디, 공공장소에서의 몸짓 하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 등 수많은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성을 여성들은 여전히 크게 느끼고 있다.  

 

그러한 문제를 조직이나 사회 전체가 다루기 시작하면 여성의 잠재력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극렬한 대립과 갈등이 있겠지만, 점차 권력의 균형이 맞춰질 때 사회의 잠재력이 극대화 된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조직은 많은 것을 잃는다. 우리 사회의 다음 경쟁력은 여성성의 발휘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다음 우리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결국 디자인과 문화 콘텐츠이며 민주주의가 발휘하는 사회 전반의 수준이다. 그러므로 격렬하게 진행되는 젠더 이슈는 우리의 수준을 한층 높여줄 주요한 의제다. 중국이나 일본은 미투가 없다. 그런 사회의 앞날은 어둡다. 우리가 이 전쟁을 먼저 치루어 이들을 선도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루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문명권, 더 나아가 세계적인 리더쉽을 갖추게 될 것이다. 곰탕집 성추행 사건의 판결에서 법원은 명확한 증거라고 할만한 것이 없음에도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 등에 손을 들어줬다. 이는 시대의 방향 제시라는 거시적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득권 남성들이 젠더 전쟁에서 져야 우리 사회가 다시 도약할 전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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