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경제를 넘어 공존경제로 (2017.01.31)

공유경제, 자본주의의 진화인가 새로운 대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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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질서와 들어맞지 않는 신질서적 요소들

공유경제는 수백 년을 이어온 역사적 자본주의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이행기적 징후의 대표적 사례다. 자본주의라는 저물어가는 구(舊)패러다임의 땅 위에서 탄생하긴 했지만, 자본주의 질서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혁신적 잠재성도 함께 갖추고 있다. 옛 패러다임에서 잉태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조이기에 혼종적 성격을 가진 셈이다. 그것이 현재 이상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힘이다.

우버와 에어비앤비, 태스크래빗의 새로운 패러다임적 요소는 소비 측면에 집중된다. 기존의 사적 소유 체계에 대한 도전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자본주의는 소유라는 자원의 관리 체계 위에서 지탱될 수 있었다. 끊임없이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함으로써 더 많은 상품을 생산-판매하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구조적 순환의 고리에 의존해왔다.

그러나 소유라는 주입된 욕망은 상품의 과잉생산을 초래했고 자연 파괴와 같은 극단적인 부작용을 양산했다. 공유경제는 개인이 소유한 자원을 네트워크라는 매개 기술을 이용해 자발적으로 교환하게 함으로써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데 적잖이 기여한다.

 

네트워크 여자 사람

 

우버는 한발 더 나아가 자율주행차를 교통수단으로 투입함으로써 사실상 자동차 소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구상을 선포하기도 했다. 우버의 구상이 실현될 경우 전통적 대량생산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은 자동차 생산 기업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버의 자율주행차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순간이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공유경제는 이렇듯 죽어있던 개인들의 자원에 네트워크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가치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또 하나의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들이 소유한 자원을 나누고 교류하는 것만으로도 가치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또한, 공유경제는 소유 및 소비 중심주의의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탈자본주의적이다. 협력적 개인의 속성에 천착하고 그 의식을 발현시키는 데 공헌하고 있기에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공유경제는 여전히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뒷단 시스템에서 비롯되는 중앙집권적 성격과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구패러다임 의존성이 그것이다.

 

우버는

우버로 상징되는 공유경제는 소비 중심주의의 결함을 보완하고, 개인이 보유한 잉여 자원을 네트워크를 매개로 생산에 투여하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탈자본주의적이지만, 뒷단 시스템에서 비롯한 중앙집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패러다임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한계를 지닌다.

 

 

초자본주의적인 그래서 대안적이지 못하다

우버와 에어비앤비를 비판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있다. ‘임시직 경제'(Gig Economy). 이 말은 공유경제의 한계를 대변하는 표현으로 곧잘 인용된다.

공유경제는 그것이 지닌 새로운 패러다임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옛 패러다임을 넘어서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임시직 경제’라는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자발적 참여자의 노동을 불안정한 위험 상태로 내몬다.

우버나 태스크래빗, 에어비앤비가 확산하고 주류화할수록 노동자들의 지위는 더 위태로워지고 노예화한다. 생산은 분산적으로 이뤄지지만, 이윤은 독점적으로 소유되는 모순된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노예 사람 인간 복종 억압

 

바웬스와 코스타키스(Kostakis & Bauwens, 2014 ; p.39)는 이 같은 공유경제 시스템을 ‘네트워크 통치 자본주의’라고 명명하면서 “신봉건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공유경제 서비스의 형태가 과잉착취(Hyper-Exploitation)에 기대고 있기에 그렇다.

사용자 인터페이스 이면에 숨겨진 뒷단의 알고리즘은 오로지 플랫폼 기업의 사적 축적을 극대화하는 목적으로 설계돼있다. 자원을 공유하는 참여자들은 이 알고리즘 설계에 대한 통제력이나 소유권을 가질 수조차 없다.

이 시스템 안에서의 노동의 지위는 자본주의라는 옛 패러다임보다 더 퇴행적일 만큼 극적으로 추락한다. 노동조합의 결성이 법리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기묘한 환경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플랫폼 기업의 이윤 독점을 위해 최소 수익 보장 체계도 무시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조차 보장받는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경제적 안전망이 공유경제에선 모조리 해체된다.

 

노동자

 

매킨지 왁(Wark, 2014)은 이런 특성에 대해 “자본주의라고 할 수도 없다. 무언가 더욱 악화시키는 것들”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것이 초래할 결과와 한계는 비교적 명확하다. 바웬스와 코스타키는 이렇게 말한다.

“네트워크 통치 자본주의 조건에서는 공유자들이 사용가치를 직접 창조하고 공유하는 동안 자본 소유자들에 의해 교환가치가 실현된다. 즉 가치 창조자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자본의 장기적인 가치 위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사람들이 실질 경제의 작동을 위해 필수적인, 재화에 대한 구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Kostakis & Bauwens, 2014 ; p.41-42)

 

공존의 구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플랫폼 협력주의(Platform Cooperativism)을 주장해온 트레보 숄츠(Sholz, 2016)는 “미래의 노동시장이 (공유경제) 단 한 가지만 모델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바웬스는 공유경제 시스템이 지속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어찌 됐든 현재의 공유경제 시스템이 향후 유일한 경제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들이다.

자본주의가 그러했듯, 극단적인 축적 시스템은 주기적인 위기를 발생시켰다. 공유경제 시스템이 품고 있는 과잉착취, 과잉축적의 속성은 자본주의의 전례대로 또 다른 위기 국면을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 공유경제 참여자의 파업일 수도 있고, 거품의 폭발일 수도 있으며, 구조적 경기 침체의 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비판만 할 이유는 없다. 공유경제는 새로운 기술적, 경제적 패러다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자원의 과잉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산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새 질서를 선보였고, 자본주의적 소유의 욕망에 제동도 걸었다. 이는 다음 패러다임으로 자연스럽게 전환할 수 있는 의식의 유연성을 주조해내고 있다.

나는 커먼스경제로의 이행이 역사의 진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물론 커먼스경제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앞에서 언급한 공유경제와 커먼스경제가 공존하며 경쟁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현재의 공유경제가 새 패러다임의 유일한 질서가 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의 퇴행이다.

 

 

 

* 슬로우뉴스의 일부를 발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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